다섯째날(10월 2일) 세번째 방문한 도시는 스위스의 종교개혁가 울리히 쯔빙글리가 활동한 취리히이다.
쯔빙글리 동상
울리히 쯔빙글리는 1484년 1월 1일 빌트하우스에서 행정가의 아들로 태어나 바젤, 베른, 비엔나 등지에서 공부했고, 1506년 글라루스의 교구 신부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군종사제로서 이탈리아 원정에 참전하였으나, 스위스인의 용병제도에 대한 폐해를 보고는 용병제도 반대운동을 전개했다고 한다. 이 운동으로 명성을 얻어 1518년 그로스뮌스터 대성당의 사제로 선출되었고, 참신하고 활기에 넘치는 설교와 교회의 미신적 요소들에 대한 비판으로 그를 더욱 유명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1519년 9월 쯔빙글리는 흑사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되었는데 이 경험으로 그의 신학적 사상이 보다 진지해 졌다고 한다.(당시 취리히에서만 흑사병으로 1,500여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성경의 명령에 절대 순종하기로 작정한 쯔빙글리는 1522년부터 가톨릭교회에 대해 비판하기 시작했는데, 금식, 음식법(사순절 기간에 돼지고기와 소시지를 먹음), 성직자의 독신주의(1524년 4월 2일 과부 안나 라인하르트와 결혼식을 올림)의 비판, 1523년에는 공개적으로 비성경적인 로마 가톨릭의 67개 조항에 대한 토론주제 발표, 교회 내의 성화, 성자들의 성상, 십자가 형상, 종교음악 등도 비판하였다고 한다.
1524년 7월 의회의 결정에 의해 교회에서 성상과 유물 제거, 그로스뮌스터 교회의 오르간 폐쇄, 그해 12월 수도원들을 해체하여 그 재산을 교육과 빈민구제에 사용, 1525년부터는 미사 폐지, 성찬시 떡과 잔을 모두 함께 나눔, 주교의 사법권 폐지, 설교중심의 독일어예배를 드림으로써 로마 가톨릭에 정면으로 도전하게 된다. 이에 따라 양진영간에 전쟁이 발발하였고 1531년 10월 카펠에서 가톨릭 진영이 승리하고 쯔빙글리는 이 전투에서 전사하게 되는데, 끝까지 가톨릭 고해신부의 도움을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의 시신은 불태워졌고 그의 재는 개혁파 사람들의 숭앙을 막기 위해 인분에 뿌려졌다고 한다.
취리히에서 일어난 쯔빙글리의 개혁운동과 제네바에서 일어나 칼빈의 개혁운동을 가리켜 “개혁파” 개혁운동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그들이 루터의 개혁운동을 보다 철저히 개혁했다는 의미에서였다고 한다.
쯔빙글리의 동상. 한 손에는 성경을, 다른 한 손에는 검을 들고 서 있다.
그로스뮌스터 교회
그로스뮌스터 교회는 서기 1100년부터 1200년에 걸쳐서 건축된 스위스 최대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이었단다. 원래 이곳은 3세기 로마인들의 그리스도인 박해로 피해 있던 취리히의 성자로 불리는 ‘펠릭스’와 ‘레굴라’ 남매가 붙잡혀 목이 잘리는 순교를 당한 곳이란다. 그런데 나중에 카를 대제가 이를 알고 성당을 세우게 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개신교회로 바뀐후 울리히 쯔빙글리가 초대목사로 부임하여 임종 때까지 설교를 한 곳으로 "종교 개혁의 어머니 교회"로 일컬어진다고 한다. 탑의 정상에는 작은 전망대가 있는데 이곳에서 바라보는 취리히의 전경이 아름답다고 한다.
그로스뮌스터 교회의 남쪽 탑. 탑의 중간에 카를대제의 상이 보인다.
왕관과 칼을 가지고 있는 카를(샤를마뉴)대제. 게르만족의 이동과 침략의 혼란을 수습하고 유럽을 통일하여 로마 교황으로부터 로마황제로 임명되었다고 한다.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서로 자기네 조상이라고 주장한단다.
첫번째 줄의 세 번째는 제단위에 세워 놓은 금송아지 우상을 숭배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모습, 네 번째 줄의 다섯 번째는 요나와 큰 물고기 이야기란다.
프라우뮌스터 교회
853년에 독일의 루드비히 2세의 딸 힐데가르트가 수녀원으로 지어서 남독일 귀족 가문의 여성들이 운영하였다는데, 넓은 영지를 소유하고 면세 등 갖가지 특권으로 재력을 쌓아, 사원을 짓고 예술가를 보호하여 취리히의 문화적 번영에 크게 기여하였다고 한다.
소박한 수도원 건물의 내부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가대 석과 높은 아치형의 복도, 취리히에서 가장 큰 오르간, 아름다운 스테테인드글라스가 있다고 한다. 성가대석 근처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들은 마크 샤갈의 작품이며, 안뜰을 둘러싼 복도에는 수도원의 설립 과정을 그린 파울 보드머의 프레스코화가 있다고 한다.
프라우뮌스터 교회의 스테인드그라스(인터넷 캡쳐). 샤갈의 작품이란다.
바서교회
취리히 시내 풍경
취리히의 시민들은 1336년 민주적으로 길드에 근거를 둔 다양한 동업조합, 상인 및 귀족들이 균형된 세력을 이루는 헌법을 만들었고, 길드가 더욱 강력해지면서 1400년에는 황제로부터 자유를 쟁취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에 따라 문화적, 경제적 성장이 가속화되어 풍요한 도시가 되었다고 한다.
취리히 시내의 트램
버스를 타고 케 다리에서 바라본 석양의 리마트강. 멀리 흰눈이 쌓인 알프스의 영봉이 희미하게 보인다.
퇴근하는 길인거 같은데 큰 개를 데리고 간다. 유난히도 큰개를 데리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 스위스 용병 ]
스위스 군인들은 16세기 초반 부르군디의 왕 챨스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이후부터 그 용맹성을 인정받아 다른 나라들의 전쟁에 용병으로 뽑히게 되었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많은 금액을 지불하는 곳에 용병을 파견하여 수입을 올렸고, 전쟁에서 돌아온 용병들은 받은 돈으로 타락된 생활을 하여 사회적 폐해가 컸다고 한다. 나아가 매매에 의해 성직자가 된 사람들의 미신적이고 부도덕적인 삶, 면죄부의 발행, 수도원들이 거두는 고율의 세금징수는 백성들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고, 용병으로 나갔던 많은 남성들이 죽어서 과부가 늘어나 축첩이 관행처럼 되었다고 한다.(콘스탄스 주교는 첩이 나은 자식에게는 4길더의 벌금을 징수하도록 하였는데, 그 수입이 한 해에 7,500길더나 되었다고 한다.) 이때의 관행으로 현재 교황청의 경비병들도 스위스의 용병들이며, 유럽에서는 우는 아이에게 "스위스 용병이 온다"고 말하면 울음을 그칠 정도라고 한다. 쯔빙글리는 전쟁에 참전한 후, 전쟁의 참혹함과 용병의 폐해에 대하여 심각히 생각하고 이를 반대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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