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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진 - '게토'에 수용된 유태인 어린아이들의 '희망의 노래'

방윤화 2012. 11. 17. 12:25

둘째날(9월 29일) 두번째 방문한 도시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유태인 수용소가 있던 체코의 테레진이다

 

테레진 이곳은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서 북쪽으로 60km 떨어진 엘베강 가에 위치한 한적한 작은 도시이다. 프러시아로부터 보헤미아(체코)를 지키기 위한 요새가 구축되어 있었으나, 눈에 잘 띄지 않는 한적한 장소로서 수용소로 적합하다고 판단한 나치에 의해 유태인 강제수용소 "게토"가 설치되었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아우슈비츠와 같이 나치의 잔혹성이 알려지면서 유명해 졌다.

 

테레진 요새

수용소로 들어가는 요새의 입구. 1780년 합스부르크의 황제 요제프 2세가 프러시아로부터 보헤미아를 지키기 위해 테레지엔슈타트(테레진)에 거대한 사각형 구조의 요새를 구축하였는데, 후기 바로크 양식으로 대 요새와, 소 요새로 구축되었다. 그러나 적들이 다른 쪽으로 침공하는 바람에 요새로서의 역할은 하지 못했다고 한다. 소 요새는 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시대부터 감옥으로 사용되었는데,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의 원인이 되었던 합스부르크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드 대공과 황태자비를 저격한 사라예보사건의 주범 가브릴로 프린치프도 이 감옥에 수용되었다가 폐결핵으로 죽었다고 한다.

 

이 곳이 테레진 임을 알려주는 입구 벽에 붙어있는 명패

 

이중 성벽을 쌓고 그 사이에는 해자와 같은 수로를 만들었던 것 같다.

 

성벽을 따라 안쪽으로 수용소가 만들어져 있다.

 

유태인 묘지

테레진 수용소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나치에 의해 희생된 29,172명을 추모하는 유태인 묘지가 있다. 커다란 십자가 하나가 유태인들의 영혼을 지키고 있다(위). 그리고 뒤쪽에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다윗의 별이 크게 서 있다.(아래)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1947년 체코 정부가 기념관을 세웠고 이후 이스라엘 정부 당국이 이곳에 희생자들을 기리는 위령탑과 희생된 유대인들의 묘지를 조성하였다고 한다.

 

 

묘석에는 고유번호와 이름, 그 밑에는 사망일자가 표시되어 있고 묘석 위에는 이들을 추모하는 이들이 올려놓은 작은 돌멩이들이 놓여 있다.

  

유태인 강제수용소 게토

테레진 게토는 1941년부터 나치가 유태인을 수용하는 유태인지구(게토)로 만들었고, 중부유럽 각지에서 체포한 유태인들을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가기 전 단계 캠프역할을 하던 곳이다. 테레진은 도시 전체가 요새화 된 곳으로 18세기에 이미 건설된 감옥시설이 있었고, 프라하와 드레스덴 구간의 철도가 가까이 있어 수송에 용이하다는 점을 들어 나치 사령부는 테레진 전체를 유태인 지구화 할 것을 명령하게 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까지 약 15만 명의 유태인, 체코인, 슬로바키아의 레지스탕스를 테레진 수용소에 강제 억류했으며, 그 중에 약 3만5천명이 이곳에서 죽었고, 약 8만8천명이 아우슈비츠나 다른 수용소로 보내어 학살을 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났을 때 1만 7000여 명만 생존해 있었다고 한다.

 

주차장에 세워진 안내판

 

유태인들이 수용소에 입소하기 위해 등록하는 곳. 중앙에 보이는 문 위에는 "일하면 자유로워 진다"라고 쓰여 있고 그 문을 지나면 수용소이다. 오른쪽에 잘 지어진 집은 수용소 관리 장교들의 숙소란다.

 

한쪽은 감방이고 다른 쪽은 목욕탕이다. 일주일에 한번 감방에서 옷을 벗고 건너편 목욕탕으로 보내져 목욕을 했단다.

 

가로 세로 5~6미터 되는 곳에 약 100명이 수용되었다고 한다. 이 침대에는 노약자와 어린이만 누울수 있었고 남자들은 누울 자리도 없을 정도 였다고 한다. 화장실도 없고, 식사는 하루에 한번 거의 물이나 다름없는 수프만 주었다고 한다.

 

밖을 내다 볼수 있는 감방의 유일한 창.

 

감방의 두꺼운 철문. 아래 위로 잠금장치가 되어 있다.

 

목욕탕 내부. 천정에서 물이 떨어져 샤워를 하게 되어 있다. 찬물만 5분정도 공급되었다고 한다.

 

세면장의 모습. 비교적 깨끗하게 만들어진 이곳은 전시용이란다. 국제적십자단체 같은 곳의 시찰단이 오면 보여주기 위해 만들었단다.

 

“이곳을 들어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합니다!”. 어둡고 긴 통로를 따라 걸어가는데 중간 중간에 빛이 스며드는 창문이 있다. 이 통로는 적의 공습에 대한 대피소 역할을 하기도 하고, 누군가를 총살을 할 때 이 통로를 통해 사형장으로 데리고 간다고 한다. 실제 통로가 끝나는 곳에는 사형장이 있다.

중간 중간에 조그마한 구멍이 뚫려 있어 밖의 동정을 살필수 있다.

 

동굴이 끝나는 지점에서 나타나는 사형장. 사람들을 벽에 세우고 총살을 시켰다고 한다.

 

사형장 인근에 세워진 추모 동상.

 

수용소의 감시탑.

 

수용소 뒤편의 독일군 주둔지는 교회, 극장, 수영장까지 있는 쾌적한 곳이었다.

 

수용소 안에 있는 수영장. 장교들이나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테레진, 희망의 노래

1942년~ 1944년에 유럽 전역에서 14세미만의 유대인 어린이 15,000여명이 이곳으로 이송되어 수용되었고, 그들 중 살아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어린이는 100여명도 되지 않았다고 한다. 더러움, 질병, 배고픔, 그리고 때로 사형을 기다리다 처형당하는 이웃들의 모습을 보고, 이 아이들은 자신들의 힘으로는 집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절망속에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수용소에서 창가에 비쳐드는 햇살이나, 작은 나비, 새 등을 바라보며 그것만으로도 작은 희망의 여운으로 만족하며 시, 그림을 통해 희망의 노래를 남겼다.

 

 

1945년 5월 구 소련군에 의해 해방된 테레진 수용소에서 후퇴하던 독일군이 미처 처리하지 못했던 어린이들의 그림과 노트 4,000여 점이 발견되어 테레진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여기에는 아이들의 꿈과 희망뿐 아니라, 눈물과 절망이 얼룩져 있다.

식료품 가게에 끝없이 늘어선 줄을, 한때 빵을 나르던 수레에 시체가 가득 차는 모습을, 그 수레를 끌기 위해 말처럼 가죽끈으로 수레에 묶인 사람들을 아이들은 봤다. 그러면서도 “이제 나는 고향집이 얼마나 소중한지 안다/그리고 그리운 집을 생각한다”며 희망을 품는다.

12살에 테레진으로 끌려온 헬가 베이소바. 그의 일기에는 이런 내용들이 적혀 있다. "우스운 일이지만, 테레진은 온천 휴양지처럼 변하게 될 것 같다. 동화에나 나오는 '식탁아, 차려져라!'라는 주문이 왜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게는 모든 것들이 다 그런식인 것 같다. 명령들이 밤에 도착하고, 아침에는 '이런 것들이 다 어디서 왔을까' 하며 놀라서 사람들은 눈의 희둥그레진다." ("테레진, 희망의 노래"라는 책에 나오는 그림과 글, 인터넷에서 가져옴)

 

전시관 앞에 서 있는 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