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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 - 얀 후스의 종교개혁지2

방윤화 2012. 11. 2. 16:05

 

프라하성

 

프라하 성은 체코를 대표하는 국가적 상징물이다. 블타바강 언덕에 있는 길이 570미터, 넓이 128미터의 거대한 성으로 9세기 이후 통치자들의 궁전으로 사용되었고 1918년부터는 대통령궁으로 사용되고 있다. 9세기말부터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설되기 시작해 고딕양식이 첨가되어 14세기 카를 4세때 지금의 고딕양식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후 1526년 합스부르크 왕조의 지배를 받으며 르네상스 양식이 도입되고 18세기에 들어서 바로크양식이 가미되었다. 성안의 모든 건축물들이 정교한 조각품들과 높이 솟은 첨탑, 화려하고 다채로운 장식으로 꾸며져 중요한 유럽의 역사적 유물로 평가받고 있다.

블타바강 건너편에서 바라본 프라하성(위, 아래는 야경의 모습).

 

 

프라하성 정문과 광장.

프라하성 정문.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가 체코를 지배하던 1770년에 세워졌으며 가운데 위쪽의 금빛 왕관은 합스부르크 왕조의 문양이란다. 양쪽 문기둥에는 사암으로 만든 동상이 있는데, 칼과 몽둥이를 든 사람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를 나타내고 그 아래 깔려 고통 받는 이들은 보헤미안 즉 체코인을 나타낸단다. 체코인은 눈이 없는데, 이는 복종하지 않는 사람은 눈을 빼 버리겠다는 위협이란다.

 

제일 멋있게 생긴 프라하성 정문의 근위병 곁에서 조심스럽게 한 장 찍었다.

 

정문 앞 광장에 서 있는 체코의 초대 대통령 마사리크의 동상.

 

 

정문 앞 광장에서 공연중인 멋쟁이 거리의 악사들.

 

정문 앞 광장에 있는 마르티네즈궁. 특이하게 입체감을 살린 타일로 외벽을 장식한 스크라비토 양식의 건물이란다. 지금은 갤러리로 사용중이다.

 

구 왕궁의 정원

구 왕궁 입구. 왕궁은 현재 대통령집무실로 사용중이란다. 1135년 소베슬라프 1세때 로마네스크양식으로 지어져 16세기까지 왕궁으로 사용되었다. 18세기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왕조의 지배시절에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의 지시에 의해 새로 지어져 여러관청들이 함께 있었다고 한다.

이 건물 3층에 있는 사무실에서 신구교간의 갈등으로 "창문투척사건"이 일어난 곳으로 유명하다. 1618년 5월23일 100여명의 체코 개신교도 귀족들은 당시 체코를 다스리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페르디난드 I세가 개신교를 박해하자 이에 반대하여 왕궁 사무국에서 시위를 벌인다. 논쟁 끝에 결국 신교도 귀족들은 두 카톨릭 지도자와 비서관들을 사무국 동쪽 창 밖으로 내던져 버렸다. 15m 높이에서 떨어진 그들은 엉덩방아만 찧고 살아났다고 하는데 바로 떨어진 곳에 거름더미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그러나 이들은 천사들의 도움으로 죽지 않고 살았다고 믿는다). 이어서 신교도 귀족들은 합스부르크의 왕을 보헤미아 왕으로부터 폐위시키고, 독일 개신교 지도자인 프리드리히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게 되고, 이 사건으로 인하여 1648년까지 전 유럽이 전쟁에 휩싸이는 "30년 전쟁"이 일어난다.

 

왕궁 제2정원에 있는 분수대(위)와 그 옆에 있는 우물(아래사진). 우물을 사용하는 보헤미안보다 오스트리아인의 우수성을 보여 주려고 우물 옆에 큰 분수를 만들었다고 한다.

 

 

왕궁 안의 모습들

왕궁 안에 있는 블라디슬라브 홀. 높이 13미터, 폭 16미터, 길이 62미터의 크기로 유럽에 있는 중세시대의 성중에서 가장 큰 홀이라고 한다. 대관식 무도회와 각종 연회가 열리고 기마상까지도 들어와 경기를 했다고 한다.

 

왕궁안에 전시된 왕관의 모습.

 

 

성 비투스 성당

 

 

제3정원에 있는 성 비투스 성당(인터넷에서 캡쳐). 보헤미아의 역대 군주들이 대관식을 올리던 곳이고 사후에는 그들의 유해가 성당 지하에 안치되었다고 한다. 프라하성 중앙에 위치하며 "프라하의 보석"으로 불린다. 2정원에서 3정원으로 들어서자마자 그 높이에 압도 당하며, 도저히 건물 전체를 카메라에 담을 수 없을 정도다(총길이 124미터, 폭 60미터, 천장높이 33미터, 탑 높이 100미터). 성당의 기원은 925년 신성로마제국 황제로부터 받은 성 비투스의 팔을 보관하기 위해 지으면서 시작되었다. 1344년에 현재의 고딕양식으로 설계되어 건축이 시작된 후 증개축이 계속되어 600여년 후인 1929년에 현재의 모습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오랜 세월동안 건축되어 중세 고딕양식의 바탕위에 르네상스 양식, 바로크 양식 등 여러 건축양식이 혼합되어 지어졌다고 한다. 사진 가운데 둥그런 장미의 창에는 2만7천여장의 색유리가 사용되었다고 한다.

 

 

성 비투스 성당의 측면 모습.

 

성 비투스 성당의 내부 모습.

 

스테인드 그라스는 아루누보스 양식의 작품이 많다고 한다.

 

성당에 있는 파이프 오르간

 

 

 

성 조지 성당

성 조지 성당. 920년 브라디슬라프 왕자에 의해 목조건물로 지어졌으나 1142년 대화재로 불에 타버렸고, 이후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새로 지었다고 한다. 체코의 대표적인 음악제인 "프라하의 봄" 축제때 연주회가 열리는 장소라고 한다.

 

 

황금소로

왕궁에 맞지 않게 좁은 골목에 알록달록 작은 집들이 늘어서 있는 곳이 나온다. 옛날에 금박장인들이 거주하던 성벽에 붙여 지은 판자집 들이 있던 곳이라고 하는데, 16세기에는 성을 지키는 병사들의 숙소로 바뀌면서 성벽에 붙박이로 지어졌다고 한다. 17세기 루돌프 2세 때에는 금을 만드는 연금술사와 과학자들이 모여 살면서 이 골목을 "황금소로"라고 불렀다고 한다. 불과 100여년 전까지만 해도 시민들이 살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기념품상, 갑옷, 무기전시관이 들어서 있다.

 

황금소로 골목 풍경.

 

 

"성", "변신"의 작가 프란츠 카프카가 작품을 집필했다는 22번지 작품실(위, 아래 사진). 집집마다 번호가 매겨져 있다. 체코출신으로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인 카프카는 1916년 11월부터 다음해 5월까지 여동생이 오빠의 집필활동을 돕기 위해 마련해 준 이 집에서 작품활동을 했다고 한다. 카프카는 매일 이곳에 나와 글을 쓰고, 저녁이 되어서야 그의 하숙집으로 돌아가곤 했다고 한다. 프라하성에서 영감을 얻어 "성"이라는 작품을 이 집에서 완성했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41세의 나이에 요절을 하고 만다.

 

 

황금소로에는 갑옷과 무기 전시장들이 있다.

 

 

또한 아기자기한 기념품 판매점들이 있다.

 

 

 

황금소로가 끝나는 곳에는 내용을 알수 없는 벌거벗은 소년 동상, 그리고 허름한 성벽이 나온다.

 

 

프라하성의 풍경

 

흑사병 퇴치 기념탑. 유럽에는 각 마을마다 흑사병 퇴치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1347년 처음 유럽에 발생하여 전 유럽으로 퍼졌던 흑사병으로 전 유럽인구의 약 1/3이 죽었다고 하니 그 두려움은 대단히 컸다고 한다.  

프라하성 정문 앞 광장에 이상하게 생긴 가로등이 있어서 찍었는데, 이 도시 최초의 가스 가로등이란다.

 

우리나라에서는 흔치 않은 세그웨이를 타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