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날(9월 29일)밤부터 셋째날(9월 30일)에 걸쳐 방문한 도시는 체코의 종교개혁가 얀 후스가 활동한 프라하이다. 프라하에 관한 내용은 프라하 구 시가지와 프라하성 2개로 나눠서 올린다.
프라하 구시가지 전경
얀 후스의 동상과 프라하광장
얀 후스(1369-1415)는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보다 100여년 앞선 1415년 7월 16일 면죄부 판매중단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이단자로 낙인찍혀 화형을 당한 사람으로서 마르틴 루터가 주장한 신학적 논의의 많은 부분을 예견했다고 한다. 처형 당시 후스는 자신의 이름이 체코어로 '거위'를 뜻하는 것에 빗대 "비록 지금 당신들이 나를 거위구이로 만들지라도, 백년후에 백조의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고, 너희들은 그 노랫소리를 잠잠케 할수 없을 것'이라는 예언을 했다고 한다. 실제로 100년이 지난 1517년 10월 31일에 비텐베르크에서 백조처럼 나타난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이룬다.
후스는 남보헤미안 후시네크 지방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프라하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으며, 1398년부터 프라하대학 철학부에서 강의, 1402년부터 3천여 명이 모이는 프라하 베들레헴성당에서 설교자로 활동, 그리고 1409년에는 프라하대학 총장이 되었다고 한다. 그의 설교는 교회개혁과 사회윤리에 관한 것이었고 평민들은 물론 왕족과 귀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들으며 열광했다고 한다. 그가 교회의 면죄부 판매에 대해 비판하자 교황청에서는 그를 핍박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얀 후스는 룩셈부르크의 신성로마 황제 지기스문트로부터 신변의 안전보장과 함께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자신의 종교적인 견해를 펼쳐 보이라는 호출을 받게 된다. 그러나 1414년 11월 그가 도착하자마자 체포되어 1415년 이단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되고, 변론할 기회나 대화할 기회도 얻지 못한 채 이단자로 판결 받아 화형대에 묶여 처형되었단다. 후스주의자들은 성만찬 때 신약성서의 "최후의 만찬" 이야기에 근거하여 빵과 포도주를 모든 참석자들이 함께 나누었다고 하는데(로마 가톨릭에서는 사제들만 마실수 있었다고 한다) 포도주를 담은 성배는 후스주의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고 한다.
프라하 광장에 있는 틴 성모 마리아교회(위, 아래는 야경의 모습). 1365년 고딕양식(내부는 바로크양식이라고 함)으로 건축된 틴 교회는 후스 전쟁후 400여년간 후스주의의 거점교회로 부패한 로마 가톨릭교회를 부정하고 종교개혁을 실천했던 곳이다. 80미터의 쌍탑이 높이 솟아 있고, 그 사이에는 마리아상을 녹여 만든 후스주의의 상징인 황금성배가 있었는데, 1961년 가톨릭성당으로 개조하면서 그 황금성배를 녹여 중앙탑에 있는 성모 마리아의 후광을 만드는데 사용했다고 한다. 뾰죽한 두 첨탑은 프라하 시내 어디서나 방향을 판단하는 랜드마크 역할을 한다고 한다.(아래 사진은 구순자 권사님이 제공하셨다)
구 시청사의 천문시계 오를로이(위, 아래는 야경의 모습). 구 시청사는 고딕양식으로 30미터 높이로 세워져 있으며 탑에 걸려있는 두개의 원이 돌아가며 시간을 알려 주는 천문시계가 유명하다. 이 시계는 1410년 천문학자인 얀 신델교수와 시계장인 미쿨라슈가 공동제작했다고 한다. 매시 정각이 되면 천문시계의 작동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든다. 시계를 이루는 두 개의 원 가운데 위쪽에 위치한 칼렌다륨은 천동설의 원리에 따라 1년에 한 바퀴씩 돌면서 연, 월, 일, 시간, 일출과 일몰, 월출과 월몰도 나타낸다고 한다. 아래쪽 플라네타륨은 보헤미아의 농경생활과 별자리를 12개 계절별 장면으로 묘사하고 있단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오래된 천문시계이자 유일하게 아직까지 작동하는 시계라고 한다. 전설에는 1490년 천문학자 하누시가 이 시계를 만들었으며 이시계의 정교함과 아름다움에 너무 감탄한 나머지 시의회에서는 하누시가 다시는 이러한 시계를 만들지 못하게 하기 위해 자객을 보내 쇠꼬챙이로 하누시의 눈을 찔러 장님을 만들어 버렸다고 한다. 억울하게 장님이 된 하누시는 죽기 전에 시계를 한번만 만져보게 해 달라고 간청하여 시계를 만지면서 부속 한개를 빼어 버렸고, 그 때부터 시계는 400년간 멈추어 있다가 1860년부터 거짓말처럼 다시 작동해 정확하게 시간을 알려 준다고 한다.
카를교
카를교는 블타바강에 구시가지와 프라하성을 이어주는 다리이다. 원래의 다리가 홍수로 유실되자, 카를4세의 명에 따라 1357년부터 1402년에 걸쳐 황제전용다리로서 돌다리로 튼튼하게 건설되었다. 길이는 520미터 폭은 10미터로 블타바강에 놓인 다리중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오래된 다리이다. 이 다리에는 30여개의 성인 상이 세워져 있으며 이들을 만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설이 있는 동상이 있어 여기에는 손길이 많이 닿아 반질 반질하다.
카를교 위에서 바라다 본 블타바강과 강변의 모습
카를교의 예수상.
고해성사의 내용은 목숨을 걸고 반드시 지켜주어야 한다는 사제의 원칙을 만들어 준 고해성사 지킴이 성 요한 네포무크 신부. 바출라프 4세 때 왕비의 고해신부였던 네포무크는 왕이 왕비를 의심하여 왕비의 고해성사 내용을 말하라는 강요를 당한다. 그러나 사제로서 이를 말할수 없다고 버티다가 결국 왕에게 혀와 다리가 잘리는 극형을 받고 블타바 강에 버리워진다. 그 뒤에 그의 시신을 못 찾다가 3년이 지난후 강위에 다섯 개의 별과 같은 광채가 떠오른 그 아래에서 신부의 시신을 찾아내어 그를 성인으로 추대하여 비투스성당에 안치했다고 한다.
블타바강에서 놀고 있는 오리들
카를교 입구에 세워져 있는 카를교를 만든 카를4세 동상과 기념성당. 카를 4세는 14세기 프라하에서 태어나 오스트리아와 독일을 아우르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지냈으며 이때가 체코의 최고 전성시대를 구가했다고 한다. 프라하의 화려하고 웅장한 건축물들은 대부분 이때 지어졌다고 한다.
카를교 위에서 공연중인 거리의 악사들. 아무나 할수 있는게 아니라 정식 오디션을 거쳐서 합격한 사람만 거리에서 공연을 할수 있단다.
프라하의 봄, 민주화의 상징 바출라프광장
멀리 보이는 건물은 국립박물관. 이 광장은 1968년 "프라하의 봄"으로 불리는 반소련.반독재 자유화운동이 탱크를 앞세운 소련의 군대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된 사건이 일어났던 곳이다. 1989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민주화운동을 이루어 낸 벨벳혁명이 일어났던 곳이기도 하다. 1968년 자유화운동의 무산으로 20년의 춥고 우울한 공산독재를 견뎌야 했던 체코슬로바키아는 1989년 "벨벳혁명"으로 자유화 민주화에 성공하고, 1993년에는 국민투표를 통해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된다.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분리 독립한 두나라의 분리는 "벨벳혁명"에 빗대 "벨벳이혼"이라고 불린다.
프라하 시내
혼잡한 프라하 시내에서 트램이 도착하자 이를 타러 몰려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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