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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텐베르크 -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도시

방윤화 2012. 10. 22. 13:14

 

첫날(9월28일) 세번째 방문한 도시는 루터의 도시 비텐베르크이다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는 비텐베르크의 성안교회당 정문에 ‘95개조의 논제’라는 제목으로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의 부당한 처사를 비판하는 문서를 전격 게시한다. 이 날이 우리가 지키는 종교개혁일이다.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는 로마의 베드로성당과 같은 대형 성당 건축 등을 위해 막대한 비용이 필요하게 된다. 교회재정으로는 부족하여 피렌체 등의 유력 재력가들로부터 차용하여 사용하였으나 이도 여의치 않자 면죄부를 판매하여 재정을 조달하게 된다. 면죄부는 가톨릭교회의 고해성사와 연관된 것으로서, 사제는 고해자의 죄고백을 듣고 죄사면을 해 주게 되는데, 이에 대한 속죄로 시편낭송, 특별기도 등 봉사를 하게 한다. 그런데 특별한 사정으로 이행할 수 없는 사람들은 교회에 기금을 내고 이러한 속죄행위를 면제 받을 수 있는데 이때 발행되는 증서가 면죄부였다. 그런데 면죄부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주요 수입원이 되자 교회는 판매전담자를 두는 등 적극적으로 면죄부 판매를 추진하게 된다. 당시 유명한 면죄부 판매자인 요한 테첼은 “금화가 헌금궤에 떨어지며 '땡그렁' 소리를 내는 그 순간 연옥에 있던 영혼은 하늘나라를 향해 올라간다”고 신자들을 기만하였다고 한다. 한편, 가톨릭교회는 성인의 날을 정하여 이를 기념하는데, 특히 11월 1일은 '모든 성인의 날'로서 루터는 이 날 많은 사람이 비텐베르크 성의 교회에 모일 것을 예상하고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바로 전날 게시한 것이라 한다.

 

 

비텐베르크 성의 성안교회

성안교회 모습. 교회가 문닫기 5분전에 도착하여 겨우 입장할 수 있었다. 저녁무렵이라 사진이 어둡고, 실내 사진은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흐리게 나왔다.

 

성안교회 내부 모습. 다행히 문닫을 시간이라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우리는 박명부 장로의 선창으로 "내 주는 강한 성이요(찬송가 585장)"를 합창하였다.

 

성안교회 안에 있는 루터의 전신초상 동판(이 사진은 송복숙 권사님께서 제공해 주셨습니다).

 

성안교회 안에 있는 루터의 묘지. 만스펠트의 백작들 사이에 있었던 법적 논쟁을 중재하러 고향인 아이슬레벤에 갔다가, 병을 얻어 1546년 2월 18일 향년 63세를 일기로 죽었다. 대부분의 종교개혁가들이 사형을 당했던데 비해 루터는 천명을 다했다고 한다.

 

"95개조 논제"를 걸었던 역사적인 성안교회 문. 문은 양쪽으로 열게 되어 있고 문짝에 동판으로 "95개조 논제"를 새겨 놓았다. 그 위의 아치형공간에 채색 성화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성경을 든 루터, 오른쪽에는 루터의 지지자였던 멜란히톤이 앉아 있고, 그 뒤로는 비텐베르크 시가지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원래는 목제 문이었으나 1857년 재건당시에 구리문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95개조 논제"의 문장들. 실내에 전시된 내용을 찍은 것임. 주요내용을 인터넷에서 찾아 정리했다.

제1조 : 우리의 주님이시며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하실 때, 그는 신자들의 전 생애가 참회되어야 할 것을 요구하셨다

제62조 : 교회의 참 보고(寶庫)는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의 거룩한 복음이다.

제68조 : 면죄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자비에 비할 바가 아니다

제95조 : 그리스도인은 면죄부와 같은 행위의 의가 아니라 오히려 많은 고난을 통해 하늘나라에 들어간다

 

성안교회 모습. 오른쪽 아래부분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 앞이 논제가 걸렸던 교회 문이다.

 

비텐부르크 시가지. 멀리 성안교회를 배경으로 우리 부부가 찍었다.

 

비텐부르크 시청 앞에 있는 마틴 루터의 동상.

 

루터의 동역자 멜란히톤의 동상. 루터의 얘기가 나오는 곳에는 반드시 그의 이야기가 따라 나온다.

 

 

루터가 설교하던 교회, 가르치던 학교, 생활하던 집

비텐부르크 시내의 성마리아교회(저녁 노을에 비친 쌍둥이 탑과 그림자 모습이 너무 좋아 보여서 한 장 찍었는데 루터가 오랬동안 설교했던 성마리아교회라고 한다). 흔히 “읍교회”라고 불리는 곳으로 최초의 독일어 예배를 올린 교회라고 한다.

 

 

루터가 교수로서 강의했던 비텐부르크대학 정문 앞

 

 

루터가 살았던 집 정문. 루터가 어려울때마다 나타나 그를 살려주고 도와주는 영원한 그의 후원자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가 후일 그에게 기증했던 저택이란다. 지금은 루터기념관이다.

 

현관을 들어서면 루터가 살던 큰 저택이 나온다.

 

루터의 집 마당에 있는 부인 폰 보라의 동상.  "결혼하면 온 세상과 사탄이 웃을 것이다", "그동안 이루어 놓은 일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다"는 동료들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1525년 6월 13일 16년 연하의 전직 로마 가톨릭교회 수녀인 카타리나 폰 보라(1499~1552년)와 결혼식을 올린다.

 

루터의 집 정원. 루터는 자녀를 6명을 두었고, 아이들을 좋아해서 12명의 조카들을 자기 집에 두어 집안이 마치 유치원처럼 항상 아이들로 가득찼다고 한다.

 

비텐부르크 도시의 풍경

비텐부르크의 도시 조감도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에 들어가려는데 길 건너편에 특이한 광경이 있어서 찍었다. 웬 노부부가 길가에서 어린아이 사진, 꽃, 그리고 촛불을 켜 놓고 어린아이를 추도하고 있는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