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외여행/북유럽

러시아 모스크바 크레믈린 궁전, 아르바트 거리, 백조의 호수, 노보데비치 수도원

방윤화 2017. 10. 18. 16:02

2017109() 오후

점심식사후 크렘린 궁전, 아르바트 거리, 백조의 호수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저녁식사를 한후 셰레메티예보 공항으로 가서 2055분발 인천행 비행기를 타고 귀국길에 올랐다. 새벽 4시에 일어나서 하루종일 돌아다녔기때문에, 비행기에 타자마자 그대로 골아 떨어졌다. 중간 기내식을 먹을때만 잠깐 깨고는 다시 자면서 지루한줄 모르고 인천공항에 도착하였다.


모스크바 시에 있는 아르바트 거리에는 빅토르 최를 기념하는 벽이 세워져 있다.


[ 크렘린 궁전 ]

크렘린은 서기 1156년 류리크 왕조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의 유리 돌고루키가 도시를 방어하기 위하여 쌓아 올린 나무요새에 기원을 둔단다. 처음에는 참호를 두른 요새를 세우고 흙으로 방벽을 쌓은 후 그 위에 목재 벽을 쌓고 방책을 만들었다고 한다. 크렘린이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성채', '가파름'이라는 뜻에서 왔다고도 하고, 초기 러시아어로 건축용으로 적합한 침엽수라는 뜻의 '크렘'(krem)에서 유래했다고도 한단다. 이후 몽골군의 침략으로 허물어진 요새를 1271년 블라디미르 대공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와 그 아들 다닐 네프스키가 보수하고 확장하면서 모스크바 대공국의 중심지에 위치하게 되었단다. 그 후 14세기에 모스크바 대공 드미트리 돈스코이가 요새의 성벽을 보강하면서 하얀색의 석조 건물로 개축공사를 했고, 15세기에는 이반 3세의 명령으로 현재의 붉은 성벽과 같이 벽돌벽과 탑, 망루, 성문 등을 추가 개축하면서 튼튼한 요새로 발전했다고 한다. 크렘린 궁전에는 15세기에 지어진 교회, 의회 등 오랜 전통을 가진 많은 건물들이 있다.


크렘린 입구

크렘린으로 들어가는 다리이름은 삼위일체교, 저 앞에 보이는 망루는 삼위일체 망루란다.

망루앞을 지키는 궁전 근위병, 궁전근위병들은 우수한 젊은이 들중에서 선발된 군인으로, 근위병 복무가 끝나고 나면 모두 탄탄한 장래가 보장된 사람들이란다.

황제의 대포. 16세기 말 안드레이에 의해 만들어진 구경890mm, 무게40톤의 세계에서 가장 큰 대포이며, 앞에 놓인 탄환은 19세기에 만들어진 장식품으로 무게만 해도 1톤이나 된단다. 러시아의 위용을 자랑하기 위해 대포에는 화려하고 위압적인 문양들을 새겨 놓았단다. 이 대포는 한번도 발사된 적이 없다는데, 실제 포탄의 직경도 포의 구경보다 커서 쓸수 없단다.


성모승천사원.

성모승천 사원에서는 국왕의 대관식, 정교회 총주교의 선출, 전쟁에 출정하기 전에 승리를 기원하는 기도회, 승리한 뒤 감사기도회, 대주교 및 총주교의 장례식이 치러졌으며, 국가 문서 및 명령서를 발표하는 곳이기도 하였단다. 특히 국왕의 대관식은 1498년 이반 3세가 손자인 드미트리에게 왕위를 넘기면서부터 시작되어 1896년 러시아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까지 400여년간 이곳에서 치러졌다고 한다. 또한 이곳에는 모스크바 대주교 및 총주교들의 시신이 모셔져 있다고 한다. 이 사원은 이반 3세가 러시아의 낙후된 건축기술을 한 단계 끌어올리기 위해 이탈리아의 건축가 '아리스토텔레 피오라반트'에 의해 건축케 하였으며 1470년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성모승천 사원 내부의 천장과 벽에는 표트로비치의 명에 의해 그려진 이콘화(벽화나 목판 등에 성서 장면 등을 묘사한 그림)가 특히 유명하다. 성상화가 150명이 총250여가지의 에피소드와 2000여 명의 인물화를 그렸다고 한다. 천장에는 12개 종교명절과 관련된 그림, 벽의 가장 윗단에는 예수그리스도의 일생, 둘째와 셋째 단에는 성모의 일생과 성모를 찬양하는 그림, 하단에는 7대 공의회, 서쪽 벽에는 정교회 전통에 따라 최후의 심판이 그려져 있다. 내부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외부만 찍었다.

대통령집무실이란다. 푸틴 대통령이 실제 근무하는 곳이란다.

이반대제의 벨타워(종루). 1505~1508년에 이탈리아의 건축가 프리아친이 건물을 짓고, 1532~1543년 페트로프 마리가 팔면체의 종루를 덧붙여 완성했다고 한다. 종루의 높이가 사원광장에서 가장 높은 81m로 모스크바를 둘러싼 수도원의 감시탑으로 적들의 습격을 알리는 신호를 보내는 기능을 하였다는데, 적의 습격이 감지되면 3개의 종이 울렸는데 수십km 떨어진 곳에서도 종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이반대제는 모스크바 대공으로서 여러 공국을 쳐서 영토를 확장하였고,북동 러시아를 통일하였다. 240여년간 러시아를 지배해 온 몽골로부터 독립하여 훗날 러시아 제국의 기초를 닦은 왕이다. 그는 1472년 동로마 제국 최후의 황제 질녀인 소피아와 결혼했는데 이것을 계기로 멸망한 동로마 제국의 후계자 및 정교회의 옹호자를 자처하며, 로마 황제의 쌍두독수리를 러시아의 문장(紋章)으로 하여 '3의 로마'로서 정교회의 총 본산이 되었다. 이를 근거로 러시아 정교회는 지금까지도 로마카돌릭보다도 자기들이 정통성이 있다고 주장한단다. 


황제의 종. 1733년부터 1735년에 걸쳐 이반 마트린과 아틀 미하일에 의해 주조된 세계 최대의 종이란다. 72kg, 525kg이 들어간 이 종의 무게는 202톤으로 직경6.6m, 높이6.1m이다. 종의 표면에는 알렉세이황제와 이바노프여제의 초상과 종의 유래를 적은 2개의 명문과 5개의 니콘이 장식되어 있다. 이 종은 1737년 모스크바 대화재 당시 뜨겁게 달아오른 종에 누군가가 찬물을 부어 일부분이 떨어져 나가, 한번도 울려보지 못했으며, 1836떨어진 부분과 함께 이반대제의 종루 앞에 설치되었다고 한다.


[ 모스크바 지하철 ]

크렘린 궁전에서 아르바트거리로 가기 위해 다시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였다.


[ 아르바트 거리 ]

모스크바 젊음의 거리이다. 문화예술의 거리이며, 민주화운동의 상징적인 거리 이다.

길거리에 미술작품을 펼쳐 놓고 판매한다.

아르바트 거리에는 유명한 시인 푸쉬킨의 신혼집이 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는 시를 쓴 사람이다. 그에게는 나탈리아라는 예쁜 아내가 있었단다. 그런데 그 아내는 러시아 근위대에 근무하는 단테스라는 장교와 염문을 뿌리고 다녔단다. 이 소문을 들은 푸쉬킨은 화가나서 단테스에게 결투신청을 하였고, 1837년 1월 27일 운명의 결투에서 푸쉬킨은 치명적인 부상을 당하고 이틀후 3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단다. 그런데 사실은 정적들이 푸쉬킨을 제거하기 위해 헛소문을 퍼트렸다는 설도 있다네요. 본인의 시에 있는대로 아내가 자기를 속일지라도 노여워하지 않았으면 안 죽었을턴데....

푸쉬킨이 예쁜 아내 나탈리아와 손잡고 있는 동상. 푸쉬킨 탄생 20주년을 기념하여 1999년에 세워졌단다. 재미있는 건 부부의 동상이 손을 잡은 것 같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손 사이에 간격이 있답니다. 그들의 사랑의 아픔을 표현한 것일까?

음유시가의 개척자 불라트 오쿠자바(1924~1997) 동상. 그는 그루지아인 아버지와 아르메니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모스크바에서 출생했단다. 그런데 아버지는 소련공산당에 의해 사형을 당하였고, 그의 어머니는 18년간 감옥에 갖혀 있었단다. 그래서 그는 당시 소련의 독재체제에 대한 저항의식이 강하였고, 통렬한 풍자로 스탈린을 비판하였다고 한다. 싱어송라이터로 시와 음악 200여곡을 작곡하였지만, 70년대말까지만 해도 공식적으로는 그의 노래가 출판되지 못하였고, 비공식적으로 녹음되어 퍼졌다고 한다.


아르바트 거리에 세워진 동상은 20025월 그의 생일에 맞춰 세운 동상이란다. 동상의 양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어가는 모습은 어릴적 그의 집에 있던 아치에서 걸어나오는 모습을 형상화하였다는데, 아치는 당시의 독재체제를 나타내고 시인은 앞으로 계속 갈지 말지를 망설이는 모습이란다. 몸은 어쩔 수 없이 체제안으로 들어와 있지만, 뒤에 있는 기다란 그림자는 체제로 들어오지 않았음을 의미한다고 한다


고려인 가수 빅토르 최를 추모하는 벽. 러시아의 국민영웅이었단다.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의 실현으로 소련 사회에 개혁 개방 분위기가 급격히 전개되자, 서방의 록 음악을 소개하고 유행시켰던 고려인 가수로서 소련 록 음악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단다. 그런데 아깝게도 28세의 젊은 나이에 그가 죽자 그를 기리기 위해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 벽에 모여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벽에 추모글과 그림을 남겼단다.



빅토르 최(인터넷에서 가져옴). 고려인 아버지와 우크라이나인 어머니 사이에서 1962621일 카자흐공화국의 크질오르다에서 태어나서, 5년 뒤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성장하였단다. 학창 시절부터 예술에 많은 관심을 가져 세로브 미술학교에 입학했으나, 그림보다는 그룹을 만들어 반체제 노래를 부른다는 이유로 퇴학을 당했답니다. 이후 여러 차례 당국의 제지를 받으면서도 아마추어 록그룹을 조직하였으며, 1982년에는 키노(KINO)’라는 록그룹을 결성하였단다. 1987년에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카 정책이 시행되면서, 개방정책으로 인해 그의 활동이 더 활발해졌는데,  “혈액형이라는 노래를 발표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 밀리언셀러가 되었단다. 이 때 빅토르 최의 록 음악 활동은 절정에 이르러, 1988년부터 덴마크, 프랑스, 미국을 방문하여 공연하였고, 1990년에는 일본도 방문하였다. 잦은 해외 공연을 경험한 그는 소련 사회의 변화를 바라는 열정을 끊임없이 나타냈지만, 우리나라의 내한공연을 앞두고 1990815일에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하였고, 그 소식을 듣고 소련에서만 5명의 여자가 자살하였다고 하며,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모스크바이외에도 카잔, 키예프, 알마아타, 타슈켄트에도 있답니다.



[ 백조의 호수 ]

백조의 호수 공원으로 들어가는 공원입구. 백조를 몇마리나 볼수 있을지?

차이콥스키가 작곡한 백조의 호수의 배경이 되는 호수란다. 그런데 호수의 크기도 자그마하고, 백조는 한마리도 안 보이고, 오리들만 호수에서 재미있게 놀고 있네요. '미운오리새끼'처럼 오리들한테 미움을 받아서 어디로 숨어 버렸나?

뒤에 보이는 건물은 노보데비치 수녀원으로 1524년에 세워졌으며, 후르시쵸프, 옐친등 유명인들의 묘지가 있단다.

영국여왕이 이곳을 방문한 기념으로 만들어준 오리 동상. 백조의 호수를 방문하고 백조 동상을 만들어 줄줄 알았는데, 오리 동상이어서 외교적으로 결례가 아니냐는 말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이곳을 찾은 아이들은 엄마오리를 타고 재미있어 하고있다.

백조의 호수 위치(구글지도)

[ 모스크바의 다른 모습 ]

모스크바의 신 개발지역의 고층 빌딩 들.

저녁식사를 한 한국식당이 있는 건물